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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마주보는 벽 

[박가연: 작은 것들의 신] 2019.01.13-02.17 갤러리밈 

 

안소연

미술비평가

 

 

1. 두 개의 벽

두 개의 마주보는 벽에는 사뭇 다른 무게와 질감의 풍경이 공존하고 있는데, 하나에는 “아주 깊고 어두운” 장면을 단단히 고정시켜 놓았고 다른 하나에는 “작은 것들의 신”이라 이름 붙인 가볍고 얕은 풍경을 간신히 매달아 놓았다. 커다란 차이를 서슴없이 한 데 펼쳐놓은 이 풍경은, 박가연의 개인전 《작은 것들의 신》(2019)이 함축하고 있는 정서를 아우르면서 일련의 반복되는 시차(視差)를 어떤 순간 가늠케 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즉, 두 개의 마주보는 벽의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만큼 둘의 시차는 선명하게 드러나지도 그렇다고 꽁꽁 숨겨있지도 않아서, 둘을 나란히 가늠하게 되는 순간은 누구도 상관할 수 없는 직관만큼이나 우연한 일이지만 또 둘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구조적인 필연이기도 하다. 마주하며 양립하고 있는 상이함과 그 둘의 분리될 수 없는 공존이 환기시키는 숱한 수수께끼 같은 상황은, 박가연의 작업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메아리 같다. 근원을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어느 한 곳으로부터 나와 두 개의 마주보는 벽 사이를 떠돌고 있는 소리처럼 말이다.  

 

2. 삼면화와 장막 

대략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전시장에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작은 벽면은, 각각 공간의 시작과 끝을 알리기도 하고 둘 사이의 허공처럼 깊고 텅 빈 공간감을 물리적으로 규정해 놓기도 한다. 이를테면, 작가가 제시한 전시장 안내도에 따르면 마주한 두 개의 벽 중에서 한쪽에서 시작한 작품 번호는 서로 모서리가 닿아있는 양쪽 벽을 나란히 지나 반대쪽 벽에 다다라서 끝이 난다. 

   그 중 전시공간의 동선이 시작되는 곳에는 삼면화 형식의 <아주 깊고 어두운>(2019)이 배치되어 있다. 박가연은 세 개의 캔버스에 목탄, 과슈, 금박, 흑연 등을 재료 삼아 익숙한 색과 형태와 구도를 통해 하나의 완결된 이미지를 그려냈다. 삼면의 나란한 구조는 두 개의 마주보는 벽과 마찬가지로 중심을 기준으로 양쪽의 마주한 대칭 구조 안에 다시 서로 다른 무게와 질감의 추상적인 형태를 공존시키고 있다. 검고 구름에 둘러싸인 바위산은, 현실을 벗어난 고립과 척박함과 위태로움을 그려내는 부동의 이미지로 확고함을 드러낸다. 이때, 박가연은 허공에 박혀 버린 듯한 그 형상을 금박의 배경으로 완전하게 둘렀다. 시선은 둘로 갈린다. 중심과 주변, 산과 허공, 암흑과 광채, 높음과 깊음…. <아주 깊고 어두운>에서는 바위산을 두른 구름, 구름 낀 바위산을 두른 광채, 그리고 구름 낀 바위산의 광채를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존하는 신령한 아우라가 마주한다. 이렇듯 완전함을 도모하는 삼면화 위의 색채와 형상들은 현실을 초과하여 “아주 깊고 어두운” 신화의 세계로 나아가는데, 뜻밖에도 화면의 왼쪽에 검게 칠하다 만 듯한 흰 배경 탓에 “아주 깊고 어두운” 감각은 현실의 것으로 또 다시 되돌아온다.  

   그 반대쪽에는, 전시 제목과 동명의 작업인 <작은 것들의 신>(2019)이 장막처럼 허공에 펼쳐있다. 크기가 모두 다른 반투명 투레이싱지에 인쇄된 나무는, 색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형태가 선명하게 보이기도 하고 유령처럼 투명한 환영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그게 무슨 상황인가 하면, 박가연은 시점도 다양해서 크기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당산(堂山)나무 사진을 여러 개 겹쳐서 하나의 화면으로 압축시켜 인쇄했는데 이때 그걸 꼭 형태와 배경을 반전시킨 네거티브 필름 같거나 아니면 채도를 없애 흑백의 명암 대조가 분명한 산수화처럼 보이게 해서 이미지의 반전과 착시를 교묘하게 뒤섞어 놓았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그는 시골마을의 당산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그 끝이 사방으로 흩어져 하늘에 닿을 듯한 장면에 좀 더 주목했다. 그것은 <아주 깊고 어두운>에서 검은 바위산이 구름과 밝은 광채에 둘러싸여 허공에서 하늘 저편 구원의 세계와 통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과도 닮아 있다. 때때로 당산나무 아래에서 굿판이 열리면 그 둘레를 화려하게 에워싸는 금줄이며 오색천이 여기서는 굳이 재현되어 있지 않더라도, 하늘과 닿아 있는 당산나무 이미지가 줄지어 가볍게 허공에 매달려 있는 전시의 상황은 이미 오색천이 드리워진 의례의 장막 그 자체를 표상하고 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마치 그 구원의 장막을 견고하게 현실의 자리에 붙들어 놓으려는 것처럼, 트레이싱지 모서리 아래에 매달아 놓은 작은 돌멩이들은 누군가의 소망과 동일시된 돌탑이나 당산의 신줏돌처럼 현실의 세계에서 홀로 신비에 둘러싸여 있다. 

  

 밑도 끝도 없는 현실에서의 이러한 초월적 세계와의 만남에 대한 소망은, 뜻밖에도 죽음이라는 비현실적인 영원한 재난을 견디기 위한 현실에서의 구원과 통한다. 때문에, 박가연은 죽음에 대한 존재의 불안과 슬픔이 열어놓은 현실에서의 구원의 통로를 조명함으로써 죽음과 구원, 현실과 초현실의 극단적인 대립이 역동적으로 서로를 무화시키면서 동시에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마술 같은 상황의 한 가운데로 진입한다. 말하자면, 각 대척점이 공존하는 비현실적인 카오스의 상황을 전혀 무리 없이 하나의 장면, 하나의 공간, 하나의 사물로 연쇄시키는 힘을, 박가연은 구조적으로 작업 안팎에서 다루고 있다. 특히 내용과 형식의 구조적인 연쇄는 개별 작업들이 전시라는 상황에서 시공간 안에 구조화될 때 더욱 강화된다. 현실과 비현실을 중재하는 죽음과 구원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관습에서 작업의 출발점을 강하게 표시해 놓은 박가연은, 그것을 참조하여 하나의 이미지가 생성되고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사유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요컨대, 검은 바위산이 있는 삼면화와 당산나무의 무성한 가지를 허공에 매달아 놓은 열 개의 장막은, 그리고 그 둘이 두 개의 마주보는 벽에 각각 자리 잡고 있는 팽팽한 구조는, 침묵처럼 죽음과 같이 비어 있는 곳에서 일시적인 의례를 통해 임의의 이미지를 구원시킬 당위로 작동한다.     

   

3. 달과 허공에 박힌 기둥

또, 반투명한 장막처럼 당산나무 가지로 가려진 푸른 하늘의 모서리를 지나면 빛을 내지 않는 무채색의 둥근 달이 현실에 없는 누군가의 빛바랜 초상사진처럼 벽에 걸려있다. “마이너스 38만 4000km”는 벽에 걸어 놓은 그 형상에 붙인 이름이다. 그건 한 눈에 봐도 하늘 바깥에 있는 달인데, 또한 쉽게 알아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마주하고 있는 가장 먼 현실 안의 땅이기도 하다. <마이너스 38만 4000km>(2019)는 그 둘을 동시에 겹쳐 놓은 이미지다. 두 개의 마주보는 벽처럼, 38만 4000km나 되는 허공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달과 땅을, 비현실과 현실을, 구원과 죽음을 동시에 표상한다. <마이너스 38만 4000km>에는 반투명한 트레이싱 종이에 인쇄된 달과 시멘트바닥의 이미지가 겹겹이 포개어져 있어서, 그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서로-닮은-세계에 대한 불가능한 소망을 어떤 부조리하면서도 역설적인 실체로 재현하고 있다. 

  

 서로 마주한 채 어마어마한 공백을 공유하고 있는 달과 땅의 이미지 아래에는, 또 다시 공간 안에서 연쇄하듯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형상이 있다. 하나는 <그때는 가질 수 없었던 것들>(2019)이고 그것과 마주하고 있는 것은 <그림자처럼 조용하고 깃털처럼 가벼운>(2019)인데, 둘 다 비어 있는 흰 색 캔버스에 검은 색 과슈로만 그려져 동양화의 절지화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때는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은 오만원권 지폐에 있는 매화를 본 떠 그린 것으로, 무명의 고목과 바위산과 달의 표면을 현실 바깥으로 향하는 구원의 통로로 믿기까지 그 형태의 존재방식에 곰곰이 몰두했던 모든 죽음의 존재가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이미지에 대해 사유했던 방식들을 환기시킨다. 말하자면, 아무런 서사와 배경이 없더라도 허공에서 검은 매화꽃이 의심 없이 단번에 상기시키는 황금색 금화에 대한 원초적인 상징처럼 말이다. 

   그건 어쩌면 현실 너머에 대한 상상과 같은 것인데, 상상은 언제나 우연한 닮음 속에서 예기치 않게 나타난다. 《작은 것들의 신》이 일련의 개별적인 이미지들을 직사각형의 공간에서 구조적으로 담아내려 했던 것처럼, 전시라는 상황과 공간은 이미지들의 세계로 어떤 순간 구체화 됐다. 그런 의미에서, 텅 빈 사각형의 공간은 누군가에게 시시각각 어떤 상상을 불러올 텐데 달의 표면과 땅의 표면 사이의 거리만큼을 상상케 하는 <마이너스 38만 4000km>가 높게 붙어 있는 흰 벽 뒤로 비밀스럽게 나 있는 미지의 공간은 그 안에서 또 다른 상상을 가중시킨다. 계단이 있고 그 계단 끝은 막다른 벽으로 갑자기 끝나버리는 이 예상치 못한 공간은, 《작은 것들의 신》이 직조해 놓은 공간과 서사의 구조에 기대어서 침묵에 둘러싸인 하나의 제단으로 상상될만한 여지를 갖게 된다. <핑크색 티켓>(2019)은 바로 그 제단 같은 곳의 가장 중앙에 수직으로 매달아 놓은 한 토막의 노끈을 지칭한다. 손때가 묻은 듯한 이 노끈 토막이 현실의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이 더 이상 현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허공 박혀 있는 기둥 같다. 그것은 또한 황금색 대기와 신비한 아우라로 둘러싸인 삼면화 속의 검은 바위산처럼, 혹은 구원으로 가는 통로에 드리워있는 장막같이 하늘과 겹쳐 있는 당산나무의 무성한 가지들처럼, 혹은 죽음을 봉인하고 있는 현실의 땅을 비추고 있는 달의 표면처럼, 현실과 현실 너머를 매개하는 “작은 신”으로서의 이미지를 표상한다. 

  

두 개의 마주하는 벽이 만들어낸 공간을 서로 반사하듯 가로질러 몇 번 왕복하다보면, 이 장소가 어쩌면 두 개의 닫힌 세계를 일시적으로 만나게 하는 문턱일지도 모른다는 직관에 닿을 수도 있다. 그때, 모든 것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초월적인 힘이 초라한 현실과 마주하는 신비로운 순간들처럼, 박가연은 낱낱의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허공 속에 단단히 만들어 놓을 수 있는 무한한 서사와 구조에 대한 믿음을 표상할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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