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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연, ‘죽음’과 예술 그리고 문명*

to die well to live well

실제 뱀의 허물과 빛을 이용한 박가연의 설치작업 <그림자와 그림자의 대화>는 밝음과 어둠의 놀이, 삶과 죽음의 놀이에 바쳐진다. 나 자신이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라운드 테이블에서도 잠깐 소개한 것과 같이, 뱀의 허물을 사용한 이 작품은 내게 이번 전시의 상징적 모습처럼 비춰졌다. 뱀의 허물, 허물은 ‘虛物’일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허물(exuvium)은 탈피각(脫皮殼), 곧 ‘벗겨지는 피부 껍질’이다. 누군가의 허물은 누군가의 잘못, 허물일까? 아닐 것이다. 벗어던지는 것은 사실(is)의 영역이고, 잘못으로서의 허물은 당위(should)의 영역이다. 실은, 이런 말이 있다면, ‘헌 살을 벗어던짐’과 ‘새살이 남’은 동시적ㆍ상관적 사태이다. 새살이 돋아날 것을 알아야 헌 살을 벗어던질 수 있고, 헌 살을 벗어던져야 새살이 난다.

 

유럽으로 유학 갔던 19세기 일본 메이지(明治) 지식인들은 ‘전면적인 주기적 교체’를 의미하는 라틴어 revolutio에서 온 현대어 revolution을 - 자신들의 격의(格義, frame of understanding) 방식에 따라 - ‘혁명’(革命)이라 의역했다. 혁명이란 『맹자』(孟子)에 보이는 말로, ‘명(命)을 혁(革)함’을 의미한다. 혁이란 ‘가죽ㆍ피부’를 의미하는데, (가령 여우나, 뱀과 같은) 동물은 ‘털갈이’를 할 때, 부분적으로 털이 새로 나거나 허물을 벗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다 벗어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털, 새살, 새 피부가 돋아난다. 그러니, 전체적 골격은 유지하고 부분을 ‘고쳐 입는’ 개혁(改革)이 아니라, ‘뼈를 바꾸고, 이전 모습 전체를 벗어던지는’(換骨奪胎) 것, 혁명이다. 뱀의 허물은 뱀의 주기적 ‘혁명’, 곧 허물벗기의 나머지이다. 뱀의 허물은 삶과 죽음, 거듭 태어남, 거듭 죽음, 주기적 되풀이-되풂-되돌아옴, 곧 순환(循環, circulation)과 그 나머지에 대한 탁월한 상징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파생된다. 순환은 정체(停滯, stagnation)가 아닌가?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를 들어보자. 테세우스의 배가 가리키는 역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의 왕이 된 테세우스를 기리기 위해 아테네인들은 테세우스가 타고 온 배를 영구히 보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배의 돛과 바닥과 노가 삭아버리게 되자, 아테네인들은 이들을 하나씩 새것으로 교체한다. 그리하여 배의 구성 부분이 모두 교체된다면, 이 배는 예전 테세우스가 타고 온 그 배와 같은 배인가 아닌가? 정체성-동일성(正體性-同一性, identity)에 관련된 이 문제는 변화가 거듭될 때, 이를 가로지르는 정체성-동일성이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를 다룬다(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이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불변과 변화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테세우스의 배는 바로 우리의 몸이자, 우리의 우주이다. 우리의 몸은 대략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은 하루에 6천만 개씩 사라지고 또다시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대략 8~10년이 지나면 우리 몸에는 이전의 세포와 동일한 세포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자, 가령 12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물론 없으며, 오직 ‘나’와 ‘존재’, ‘정체성-동일성’ 등의 정의에 따른 답들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이에 대한 가장 ‘시적인’ 대답은 피터 신필드(peter sinfield)가 가사를 쓴 70년대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pfm의 노래 <이 세계가 이 세계가 되었다>(the world became the world)일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순환은 결국 ‘정체’라는 말일까? 우리 안팎의 순환시스템이 작동할 때, 우리 자신과 우주는 ‘정체’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때, 우리와 우주는 모두 순환한다. 순환이란 - 정체 혹은 불변(不變, changeless-ness)이 아니라 - 변화의 지속(changeless-less-ness)일 뿐이다. 우리 조상들의 세계에는, 절대가 절대 없다! 순환은 에코시스템이다. 이는 삶, 죽음, 그리고 삶과 죽음의 관계에 관련된 우리의 상식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청한다.

 

박가연은 바로 이 죽음의 문제, 모든 생명체, 어떤 ‘죽어야만 하는’(必死, mortal) 존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특히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의 죽음이라는 문제에 천착한다. 이는 단적으로 저 세계, 저세상의 문제, 곧 ‘종교’의 문제에 연결된다(‘저세상’의 개념이 고안된 후에만 이 세상은 ‘이 세상’이 된다. 이 세상과 저세상은 오직 같이 태어나고 같이 죽을 뿐인 ‘쌍둥이들’이다). 이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상(장례)과 제(제사)에 해당되며, 박가연의 작업은 상례과 제례에 집중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전 작업, 가령 이번 전시에도 등장한(<nirvana #4>) 비디오 작업 <nirvana #n> 시리즈는 얼핏 ‘생선이 차려진 제사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물고기를 위한’ 제사상이다. 마찬가지로, 만장(挽章)이 휘둘러 쳐진 망자(亡者)의 ‘집’을 다룬 전시 <망월>(望月, 2021)에 등장한 <오래된 농담>, <텃새들>, <작은 철새>, 망자가 저세상을 향해 타고 떠나는 배 위에 놓인 꽃상여를 형상화한 2019년의 <밤끝을 향한 여행>, <유영하는 자들>, <이름 없는 자의 노래> 등도 모두 이런 계열에 속한다.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작품, 곧 달그림자 아래 뱀 허물을 비추는 <그림자와 그림자의 대화>는 바로 이러한 상황 전체를 아우르는 표제작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세 개의 대나무 장대가 서로에 기대어 교차하며 서 있고, 면으로 된 실과 오래된 방울이 함께 있는 <뱀을 낚는 시간>은 순환, 곧 죽음에 대해 인간이 품을 수밖에 없는 양가적 감정, 곧 이끌림과 두려움을 형상화하는 작품이다(이끌리는 두려움, 두려운 이끌림). 장례 행렬을 이끄는 깃대를 의미하는 ‘공포’(功布)의 형상을 갖는 작품의 아래에 놓인 ‘뱀 잡는’ 백반(白礬)은 인간의 이러한 양가적 감정을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인류가 맞닥뜨린 최고, 최대의 문제는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아무도 원치 않지만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종착역,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기원에는 아마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가련한) 의지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처리만이 문명을 낳았다. 침팬지나 보노보는 동료의 사체(死體)를 처리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사체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처리’한다(문화인류학적 사실에 합치하는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면, 실은 거꾸로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사체의 처리가 (인간이 아닌 무엇으로부터) 인간을 만들었다. 이는 사체에 대한 처리가 인간을 수행적으로 형성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죽음을 관장하는 자를 옛 시대에는 땅과 하늘을 잇는 자, 곧 무(巫, shaman, medecin man)이라 불렀고, 이 무는 고치는 이(醫)이자, 춤추는 이(舞, dancer)이자, 노래하는 자(musician)이자, 그림을 그리는 자(artist)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술의 주술적(shamanistic, magical) 기능을 의미하는데, 박가연은 작품은 바로 이러한 예술과 죽음의 관계를 자신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재설정한다. 박가연의 이러한 재설정 작업은 -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관계를 상상하고 실행해본다는 점에서 - ‘실험’이라는 말로 기술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실험을 통해, 박가연은 예술(과 이에 연관된 문명)의 기능과 정의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박가연의 심미적ㆍ문명사적 실험은 명백히 문화인류학적 층위를 갖는 것으로, 나는 박가연의 이러한 작업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매우 흥미로운 마음으로 지켜볼 작정이다.

허경 / 철학자, 철학학교 헤윰 교장

rendezvous00@naver.com

*본 글은 2022년 제주 산지천갤러리에서 개최된 전시 <거름 내는 소리>의 평문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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